느후스단이 된 감독들-감리교단에 과연 필요한가?

작성자 정보

  • 이완구 작성
  • 작성일

컨텐츠 정보

  • 143 조회
  • 2 댓글
  • 0 추천
  • 0 비추천
  • 목록

본문

최근 교단 지도부가 보여준 행태는 기가 막히다 못해 경악스러울 지경이다.

사랑과 공의 뉴스의 대표이신 박온순 목사님께서 쓰신 글을 읽어 보니 의분이 치솟는다. 그 내용을 간단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남재영 목사라는 사람이 퀴어 집회에 가서 동성애 하는 사람들을 축복해줬는데, 감리교단에서 남재영 목사를 출교시켰다. 출교당한 남재영 목사는 사회법정에 이 출교가 부당하다고 재판을 신청했는데, 사회법정에서는 남재영 목사의 출교 절차에 문제가 있다면서 감리교단의 판결을 무효화 했다. 그러자 감리교의 신실하신 목사님들이 이 사회법정의 판결에 대해 항소를 준비했다. 그러나 감리교 교리와 장정에는 감리교 감리사나 감독만이 항소권이 있다고 한다. 지난 6월 18일이 항소를 할 수 있는 마지막 기일이었다. 그러나 항소권이 있는 감독이 의도적으로 그랬는지 아니면 어떤 이유가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직인만 찍으면 되는 항소를 하지 않아서 이 재판이 항소도 못해본 채로 끝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항소를 포기한 구체적인 내부 사정—법리적 판단이었는지, 다른 고려가 있었는지—은 감독 본인의 입을 통해 충분히 설명된 바가 없다. 그 설명이 나오기 전까지 이를 형사적 배임이나 의도적 직무유기로 단정하는 것은 신중하지 못한 일일 수도 있다. 다만 결과만은 분명하다. 절차도 명확했고 비용 부담도 없었던 그 마지막 기회가, 교단의 지도자인 감독 스스로의 손에서 닫혀 버렸다는 사실이다.

성도들은 주님을 위해 목숨이라도 버릴 각오로 신앙을 지키는데, 성도 무리의 대표라는 감독은 직인만 찍어 주면 되는 항소를 하지 않은 것이다. 감독의 자리에서 가장 가볍게 해결할 수 있었던 그 한 번의 결단을 내리지 않은 것이다. 의도가 무엇이었든, 그 결과의 무게는 감독 한 사람이 아니라 교단 전체가 짊어지게 되었다.


이 사건을 지켜보며 나는 감독제도가 감리교에 왜 필요한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과연 감독이란 자들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본래 교회의 제도란 복음을 위한 수단이다. 양 떼를 보호하고, 진리를 수호하며, 교회의 질서를 세우기 위해 존재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 수단이 목적이 되고, 그 제도가 오히려 복음을 방해하고 감독의 명예를 위한 존재 이유로 삼기 시작한다면 어떻게 될까?


고등학생 시절 읽었던 한 수피즘 우화가 떠오른다.
어느 수피즘 지도자가 고양이를 예뻐하여 집에서 키웠는데, 이놈의 고양이가 예배를 드릴 때마다 여기저기 싸돌아다니며 말썽을 피우기 때문에 예배에 무척 방해가 되었다. 그래서 그 지도자는 할 수 없이 예배 시간에는 고양이를 기둥에 묶어 두었다. 세월이 흘러 지도자가 죽고 나중에는 고양이도 죽었다.
그러자 제자들은 고민하였다.
“이제 고양이가 없는데 어떻게 예배를 드리지?”
결국 그들은 새로운 고양이를 한 마리 사 와서 기둥에 묶어 놓고 예배를 드렸다고 한다.

웃음이 나는 이야기다.
그러나 어쩌면 이것이 감리교단의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고양이를 왜 묶어야 하는지 본질을 모른채 묶어 놓을 고양이가 없으면 불안해한다.
감독이 왜 있어야 하는지 본질을 모른채 복음에 방해되는 감독제를 끝까지 유지하려 하는 감리교단의 모습이 새로운 고양이를 사오는 수피즘 제자들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누가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허리가 굽은 여인을 고치셨다. 그런데 회당장은 이를 보고 예수님께 성질을 냈다.
“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분내어 무리에게 이르되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하지 말 것이니라 하거늘”(눅 13:14)
성경에 나오는 이상한 장면 중의 하나이다.

나는 최근에 아픈 아들을 간호하다가 허리를 삐끗했었다. 허리를 삐끗하니 몸을 숙이기도 힘들도 펴기도 힘들었고, 심지어 양말을 신어야 하는데 손을 발까지 뻗을 수조차 없었다. 진통제를 먹었으나 아픈 것은 똑 같았다. 파스를 허리에 붙였더니 파스 붙인 자리에 알러지가 올라와서 피부까지 망가졌다. 허리 때문에 고생한 기간은 고작 2-3일 정도였고 다행히 하나님의 은혜로 완전히 좋아졌지만, 허리가 아파서 느낀 고통은 정말 심각했었다. "하나님, 제가 할 일을 다 했다면 차라리 지금 저의 생명을 거두어 주셔요" 라고 기도할 정도로 마음의 우울과 육신의 고통이 극심했었다.
그런데 18년 동안이나 사탄에게 매여 허리가 굽어 있던 한 여인이 느낀 그 고통과 우울감, 그리고 그 가족들이 함께 느꼈을 절망과 슬픔은 오죽했겠는가. 이렇게 육체의 질병과 사탄의 메임에서 풀려나 자유를 얻었는데도 회당장은 함께 기뻐해 주지 않았다. 기뻐하기는 커녕 예수님을 향하여 오히려 분노하였다.
그에게 안식일은 사람을 살리는 하나님의 날이 아니었다. 안식일은 그저 체계가 되었고 규칙이 되었으며, 인간이 관리하는 종교 질서가 되어 버렸다. 그는 안식일의 주인이신 하나님 앞에 서 있으면서도 정작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못마땅해 했다.

인간은 하나님보다 하나님에 대한 체계를 더 사랑할 수 있다. 예수님은 이것을 외식이고 위선이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이렇게 호통을 치셨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 23:23)
주님은 십일조를 폐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고 본질을 잃어 버린 제도나 행위를 책망하신 것이었다.
종교는 남아 있었지만 긍휼은 사라졌고, 계명은 남아 있었지만 하나님은 잃어버렸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속 ‘대심문관’ 이야기에서 이 비극을 놀라울 정도로 깊이 묘사한다.

16세기 스페인 세비야, 종교재판과 화형이 일상이 된 시대에 예수님께서 다시 오신다. 군중은 눈물을 흘리며 그분 앞에 엎드리지만, 교회의 최고 권력을 가진 늙은 대심문관은 예수님을 체포하여 감옥에 가둔다. 그리고 밤이 되자 감옥으로 찾아와 조용히 말한다.

“왜 오셨습니까? 당신은 우리를 방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당신의 일을 수정했습니다.”
대심문관은 살아 계신 하나님보다 안정된 종교 체계를 선택하였다. 그래서 결국 예수님은 종교 체계 안에서 가장 불편한 존재가 되어 버린다.

얼마나 두려운 말인가? 대심문관의 말을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주님, 당신 방식으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당신의 계명을 더 현실적으로 바꾸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회당장도 같은 말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주님, 안식일에 병 고치시면 안 됩니다. 규칙이 무너집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부인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의 길을 수정하였다.
살아 계신 그리스도보다 그리스도에 대한 체계를 더 사랑한 것이다.

그러나 대심문관 이야기의 마지막에서 예수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신다. 변론도 하지 않으신다.
다만 늙은 대심문관에게 조용히 입맞추실 뿐이다.
그 모습은 마치 마가복음에 나오는 부자 청년에게 아무 말씀도 하지 않고 따뜻한 눈길로 바라보시기만 하던 장면을 생각나게 한다.
부자 청년이 자신은 어려서부터 계명을 다 지켰다고 말하였을 때 성경은 이렇게 기록한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막 10:21)
예수님은 청년의 우상을 알고 계셨다.
대심문관의 교만도 알고 계셨다.
그러나 먼저 사랑하셨다.
어쩌면 오늘 우리를 향한 시선도 그러할 것이리라.


구약 성경에는 이보다 더 무서운 이야기가 있다.
히스기야 왕은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산산이 부수어 버렸다.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이라 일컬었더라”(왕하 18:4)
놋뱀은 원래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도구였다. 불순종과 원망으로 인해 불뱀에 물려 죽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놋뱀을 만들라고 하셨다. 그리고 그 놋뱀을 장대에 매달아서 놋뱀을 바라보기만 하면 살아나게 하셨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백성들은 하나님이 아니라 놋뱀에게 신통력이 있다 생각하여 분향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히스기야는 놋뱀을 과감히 부수어 버렸다. 모세의 유물이라고 하여 보존하지 않았다. 전통이라고 하여 감싸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을 느후스단, 곧 “한낱 놋조각”이라고 불렀다.
하나님의 선물조차 하나님보다 더 사랑받는 순간 우상이 되기 때문이다.


이제 다시 원래의 주제로 돌아가보자.

감리교의 감독제 역시 마찬가지다.
웨슬리가 감독제를 둔 이유는 감투를 만들기 위함이 아니었다.
교회를 지키고 진리를 수호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감리교의 ‘감독(Bishop)’ 직제는 본래 요한 웨슬리의 영적 유산을 따라, 양 떼를 영적으로 돌보고 교회의 순수한 복음을 이단과 세속화로부터 수호하기 위해 세워진 파수꾼이었다. 교회를 온전히 지키기 위한 ‘수단’이자 ‘제도’였던 셈이다. 그러나 오늘날 감리교의 감독제는 과연 존재하는 이유를 증명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저 예배당 기둥에 의미 없이 묶여 있는 고양이에 불과한가.


어디 남재영 목사 사건 뿐이랴? 양 떼를 노리는 이단 문제에 대처하는 일선 감독들의 모습도 안일하기 짝이 없다.

필자는  호남연회 소속 익산의 모교회의 정OO 목사의 이단적인 설교에 대해 호남연회 감독과 감리사에게 이단성을 조사해달라고 요청했었다. 그러나 호남연회 감독과 감리사는 명백한 이단성 문제를 두고도 “아무 문제 없다”며 서둘러 종결지었다. 호남연회에서 무시한 이단 문제가 정작 총회 차원의 이단대책위원회에서는 사안의 심각성을 다시 지적하며 해당목사에게 "권면"이라는 평결을 내렸다. 물론 권면이라는 평결도 그런 이단적인 설교를 하는 목사에게는 솜방망이 처벌에 불과한 것이지만, 그래도 그 목사의 신학이 잘못되었다는 증거가 되었다는데 의미가 있었다.

현장의 감독들이 이런 사안에 둔감하다면, 고양이가 생선을 맡은 꼴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성도들은 도대체 누구를 믿고 따라야 한단 말인가.

이제 감독직은 교회를 지키는 영적 카리스마는 사라진 채, 감투와 권력, 학연과 지연을 동반한 정치 파벌의 중심지가 되어 버렸다는 우려가 곳곳에서 나온다. 사명을 잃어버린 채 직제만 유지하려는 지도자의 모습은, 대심문관이 “우리가 당신의 일을 수정했으니 방해하지 말고 떠나라”고 속삭이던 그 오만함과 무섭도록 닮아 있다.
물론 이 모든 문제가 ‘감독제’라는 제도 자체의 결함인지, 그 제도를 운용하는 사람과 문화의 결함인지는 따져볼 필요가 있다.

웨슬리가 감독직을 세운 본래 취지는 분명 선했다. 제도가 잘못 설계된 것이 아니라 그 자리를 지키는 이들이 본래의 사명을 잊었을 뿐이라는 반론도 충분히 가능하다. 그러나 같은 결함이 반복되고, 견제와 책임을 묻는 장치가 사실상 작동하지 않는 상태가 오래 지속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운용의 문제’로만 설명할 수 없다. 책임은 무겁고 보상은 가벼운 자리일 때 사람들은 그 자리를 꺼리지만, 책임은 가벼워지고 보상만 남는 자리가 되면 그 자리를 지키는 일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린다. 지금 감리교의 감독제가 그 갈림길의 어느 쪽에 더 가까운지, 교단은 스스로 냉정하게 점검해야 한다.

사명을 잃은 지도자들에게는 과거 하나님의 일을 소홀히 하고 자식을 방치했던 엘리 제사장 가문에 내린 엄중한 심판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경고가 결코 가볍게 들리지 않는다. 감독제라는 제도가 본래의 사명을 잃고 그 자체로 우상이 되어 감리교의 순수한 전통과 성도들을 갉아먹고 있다면, 이제는 진지하게 물어야 한다. 과연 감리교에 지금과 같은 형태의 감독제가 꼭 필요한가? 제도를 폐지하고 의회주의적 구조로 전환해 권력을 분산시키든, 혹은 감독의 책임과 견제 장치를 실질적으로 강화하든, 무엇이 감리교를 살리는 길인지 교단은 더 이상 미루지 말고 답해야 한다.
신앙이 타락하는 가장 무서운 순간은 죄를 짓는 순간만이 아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하나님 없이 종교 체계와 감투만 유지하는 순간이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을 붙들고 있는가, 아니면 감독제라는 ‘고양이 끈’을 붙들고 있는가? 그리고 혹시 오늘도 우리는, 살아 계신 예수님의 공의를 우리 종교의 감옥 속에 가두고 있는 것은 아닌가.

법과 원칙은 누군가 어려운 순간에 그것을 지킬 때에만 살아있는 것이 된다. 비용도 들지 않고 절차도 명확했던 그 순간에 법이 작동하지 않았다면, 그 법은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교단이 이대로 자정 능력을 잃는다면, 성도들에게 외면받고 역사 속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처참한 결과를 맞이할 것이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을 붙들고 있는가.

아니면 감독제라는 느후스단과 고양이 끈을 붙들고 있는가.

다시 한 번 감리교단에게 냉철하게 질문한다.


이완구 박사(익산 맑은샘내과 원장, 전 영생교회감리교 권사)


 


관련자료

댓글 2

박온순님의 댓글

  • 박온순
  • 작성일
이완구 권사님께서 이해할 수 없다는 부분,

 “물론 항소를 포기한 구체적인 내부 사정—법리적 판단이었는지, 다른 고려가 있었는지—은 감독 본인의 입을 통해 충분히 설명된 바가 없다”는 내용에 대하여 말씀드립니다.

1. 감독과의 면담 상황

1) 감독외 전•현직 남부연회 심사위원장을 대동하고 좌우에 앉힘. 본부 직원인지, 또는 교회의  부목인지 남성•여성 2인이 동석함 => 총 5인 동석

2) 박온순 목사가 자신을 소개한 후에 감동대 회원 각자 소개함. 모두 5인이 울산까지 방문한 취지를 말하고 대화의 내용을 녹음하겠다고 하였으나 감독은 용납하지 않겠다고 함.

3) 감독은 미소만 지은 채 거의 입장을 말하지 않고 좌우에 있는 전 •현직 심사위원장들만 자신의 소견을 밝힘

2. 전 •현직 심사위원장의 입을 통해 감독을 대변한 듯, 결론적으로 다음은 그분들의 핵심적인 소견.

1) 현직 심사위원장의 변

“동성애에 대해서는 교단적으로 입장이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이제 은퇴한 목회자에게 이런 문제를 들어 자꾸 또 항소하고 어떻게 해봐야 우리 교단이나 여러 사람이 상처를 받을 뿐이지 해결이 안 된다”라는 입장이었음

2) 박온순 목사의 반박

“몸에 암덩어리가 자라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수술을 하려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모든 세포가 고통스럽고 아플 것이다. 그런데 목사님 논리라면 다른 기관들이 아프니까 그냥 놔두자, 라는 논리다. 그것은 상처가 아니라, 죽으라는 것이다. 이 문제를 치리하지 않으면 감리교회 전체가 더 상처를 받는다. 이런 일로 떠난 성도들도 적지
않다.

예수님도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하셨다. 검을 주러 오셨다고 하셨다. 죄를 용납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지금까지 우리 감리교회가 변선환 교수의 영향하에 반성경적인 다원주의와 혼합주의 자유주의 등 인본주의 뿌리에 근간을 두고 목사들이 활동해 왔다.

내가 “사랑과 공의 뉴스”를 창간한 이유가 무엇인지 아느냐? 퀴어집회에 축복식한 자들의 재판을 지켜보며 이는 정치적인 재판이라고 판단할 수 밖에 없었고, 솜방망이 판결에 교계의 언론도 다 치우쳐 있어 안되겠다 생각하고 13일 만에 창간한 것이다.

목사는 단 하나 주님의 명예와 거룩하신 이름을 높여드리기 위해 사는 자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저들의 활동 저변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동성애자로 생각하기에 방자한 행동을 하는 것이다. 이동환이 요즘도 하고 다니는 짓을 보라. 이 사진을 보라.

”동성애는 신이다“라고 하는데 남재영은 이동환을 지지하며 우리도 출교해 봐라, 하면서 똑 같은 짓을 했다. 그런데 나둬야 하느냐?

금번에 반드시 항소해야 한다. 만일 항소를 안하면 이 문제의 책임 소재를 묻게 될 것이다. 감독님이 피해갈 수 없을 것이다.

1) 심사위원장

협박하는 것이냐?

2) 박온순

예고하는 것이다. 그리 되지 않기를 바란다. 비용도 우리가 다 지불할 것이니 항소해 달라. 변호사에게 전화 한 통이면 알아서 다 할 것이다.

4. 결론은 항소 포기였다.

예고한 대로 이제부터 다시 시작하리라.

# 제 개인적인 생각에도 권사님의 생각처럼 차라리 감독직은 없는 것이 훨씬 선교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현재 상황에서 그럴 수는 없고 문제 있는 분들 탄핵까지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길이 대한민국을 위기에서 건지는 길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이완구님의 댓글

  • 이완구
  • 작성일
박 목사님, 먼 울산까지 직접 내려가셔서 감독의 무책임한 민낯을 확인하고 오시기까지 그 고뇌와 수고가 얼마나 크셨는지요?

이미 항소 기한이 지나 사회 법정의 원심이 확정된 상황이지만, 교단의 공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 우리가 낙심하지 않고 취할 수 있는 법적, 교단적 후속 대안들을 공유하고 싶습니다.

1. '절차 무효'에 따른 재징계 및 재판 추진
이번 사회 법정의 판결은 내용이 아니라 '출교 절차의 하자'를 문제 삼았다고 했습니다.  이는 교단이 적법한 절차를 처음부터 다시 밟아 재징계(출교)를 의결하면 언제든 다시 바로잡을 수 있는 문제입니다.

2. 고의적 직무유기에 대한 '감독 직무집행정지 가처분'
비용 부담도 없고 승소 가능성이 명백한 재판을 고의나 중과실로 포기하여 교단에 심각한 영적, 물질적 손해를 입힌 감독에 대해, 사회 법정에 '직무집행정지 가처분'을 신청하고 교단 내부 심판위에 고발해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3. 목사님이 말씀하신 '탄핵'과 제도 개혁 연대
목사님이 언급하신 탄핵을 포함하여, 이번 사태를 계기 삼아 감독의 독점적 항소권을 견제할 수 있도록 '교리와 장정'을 개정하는 입법 운동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법과 원칙은 어려운 순간에 그것을 지킬 때에만 살아있는 것"이라는 고백처럼, 저들의 꼼수로 법은 잠시 가려졌을지 몰라도 공의를 향한 진짜 싸움은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박 목사님의 외로운 싸움에 늘 기도로 동역하겠습니다.  주님을 위한 사랑과 헌신에 감사드립니다 목사님.

최근기사




알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