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본주의 (Theocentrism)의 반대는 인본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 capitalism)이라고 설교하는 어느 목사의 궤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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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완구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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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을 넘어지게 하는 계략을 가르쳐 주는 발람-
 

발람은 하나님의 뜻을 알면서도 세상의 이익과 권세를 좇아 타협했던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겠다”고 말하면서도, 결국 모압 왕의 은혜를 얻기 위해 이스라엘을 넘어뜨리는 계략을 가르쳤습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신앙의 언어같았지만, 그 마음은 이미 세속의 이익에 붙들려 있었습니다.

오늘날 강단에서 “신본주의의 반대는 인본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라고 설교하면서 교묘하게 공산주의 이념을 심어주는 목사의 모습이 바로 그 발람의 길과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현재 문제되는 익산의 한 감리교 목사의 설교를 듣다가 매우 당황스런 궤변을 들었습니다.
그 목사는 “신본주의의 반대는 인본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라고 주장하더군요.
얼핏 들으면 이 말이 단순히 물질만능주의를 경계하는 메시지로 들립니다. 그러나 내용을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해 보면, 이건 단순한 자본주의 비판이 아니라 복음 자체를 굉장히 이념적으로 왜곡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 이 논리의 결론은 공산주의 찬양인가?
이 논리를 그대로 따라가면 결국 이런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자본주의의 반대는 공산주의 → 자본주의가 신본주의의 반대라면 → 공산주의는 신본주의와 일치한다”
이게 말이 될까요?

공산주의 체제 아래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우리는 역사를 통해 알고 있습니다. 북한, 소련, 중국, 캄보디아 등에서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박해를 받았고, 교회는 파괴되었으며, 성경은 불태워졌습니다. 수백만 명이 예수님을 믿는 신앙을 이유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런 공산주의 체제를 신본주의와 같은, 혹은 비슷한 개념이라고 연결 짓는 것은 신학적으로도, 역사적으로도 너무나 위험한 주장입니다. 한마디로 이단적인 주장입니다.

2. 이런 이론의 배경에는 해방신학이 있다.
이런 해석의 배경에는 ‘해방신학’이라는 흐름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해방신학은 20세기 중남미에서 등장한 신학 사조로, 마르크스주의의 사회 분석을 신학에 끌어들였습니다. 해방신학자들은 자본주의를 구조적 죄악으로 규정하고, 예수님의 복음을 사회적 해방 운동으로 바꾸어버립니다. 계급 해방, 정치 투쟁, 사회 개혁이 곧 구원의 내용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문제는 이 사조가 성경 해석에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데 있습니다.
이 목사는 누가복음 4장에서 예수님께서 “가난한 자, 포로 된 자, 눈먼 자, 눌린 자”에게 복음을 전하신다는 말씀을 오직 사회적 약자 계층 — 즉, 비정규직, 장애인, 노숙자, 이주 노동자 등 — 에게 해당되는 말로 해석하여 본문의 의미를 축소, 혹은 왜곡합니다.
물론 예수님은 약자들에게 관심이 많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해방’은 단지 사회 구조나 계급 체계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 있는 모든 사람을 자유롭게 하시는 복음의 능력이었습니다.
‘눈 먼 자’는 단지 시각 장애인이 아니라 영적 진리를 보지 못하는 이들을 뜻했고, ‘포로 된 자’는 단지 감옥에 갇힌 사람이 아니라 죄의 사슬에 묶인 인류 전체를 의미했습니다.

3. 해방신학적 성령론을 주장하는 목사.
이 목사는 요엘서를 설교하면서도 성령님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 임하신다고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단지 가난하고 소외되고 어려운 환경에 처한 사람에게, 심지어 이슬람교도들에게도 성령님이 임하신다고 설교하여 문제를 일으킨 적이 있는데, 아직도 정신을 못차리고 이런 해방신학적인 설교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목사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도 성령이 임한다고 주장했지만,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사도행전 2:38)
“세상은 능히 성령을 받지 못하나니…” (요한복음 14:17)
성령은 예수님을 믿고 회개한 자 안에 내주하시는 분이시지, 단순히 억눌린 자를 위로하기 위해서 임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4. 자본주의는 성경의 가르침과 조화를 이룬다.
자본주의는 성경의 가르침과 조화를 이루는 요소들이 많은 제도입니다.
성경은 사유 재산을 인정하고, 정직한 노동과 그에 따른 보상을 장려하며, 자유로운 거래와 계약의 정당성을 지지합니다. 십계명의 “도둑질하지 말라”는 명령도 결국 개인의 재산권을 전제로 한 것입니다.
아브라함, 욥, 보아스, 솔로몬과 같은 성경 인물들도 하나님께 받은 복으로 부유하게 살았고, 예수님께서도 달란트 비유를 통해 자본을 활용해 이윤을 남긴 종을 칭찬하셨습니다. 이는 성경이 부나 이윤 자체를 죄로 보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와 같은 성경적 경제관은 종교개혁자 칼빈의 사상에도 잘 나타납니다.
칼빈은 사유 재산과 이윤 추구를 정당하게 인정했고, 노동과 근면, 절제와 검소를 신자의 경제 윤리로 강조했습니다. 그는 이윤 자체를 죄악시하지 않았으며, 다만 가난한 자를 착취하거나 탐욕에 빠지는 것을 분명히 경계했습니다.
물론 성경은 탐욕과 물질숭배, 부당한 착취를 강하게 경고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체제’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죄된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자본주의를 곧 복음의 반대처럼 악으로 규정하는 것은 성경을 왜곡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어떤 체제 속에서도 우리가 정직하게 일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라고 가르칩니다. 바로 이것이 신본주의적인 경제 윤리입니다.
우리가 경계할 것은 물질이 맘몬이 되어 하나님보다 우선시되는 물질 만능주의인 것이지 자본주의 자체가 아닙니다.

5. 자본주의를 사탄의 체제로 규정하는 자들.
하지만 자본주의 체제를 악으로 규정하고 그것을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상으로 규정하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발상입니다. 이런 주장을 하는 자는 공산주의자들이며 마르크스주의자들입니다.
복음은 정치 이념도, 사회 운동도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그를 믿는 자마다 죄 사함과 구원을 얻게 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6. 어떻게 분별할 것인가?
우리는 설교를 들을 때 이런 점을 분별해야 합니다.
그 설교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중심에 두고 있는가?
죄와 회개, 믿음과 구원이라는 본질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가?
성령에 대한 가르침이 성경과 일치하는가?
사회 정의라는 이름 아래, 복음을 대체하려는 정치적 이념이 끼어들고 있지는 않은가?

7. 해방신학; 막시즘의 또 다른 이름.
바울은 갈라디아서 1장에서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해방신학은 ‘다른 복음’을 포장하고 있습니다. 선한 의도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복음의 본질을 희석하고 변질시킨다면, 우리는 단호하게 거절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인간의 구원이며, 참된 복음이 곧 세상의 소망입니다.
우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할 때입니다. (로마서 12:2)

이완구박사 (맑은샘내과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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