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코틀랜드 교회를 무너뜨린 성경비평학
작성자 정보
- 최광희 작성
- 작성일
컨텐츠 정보
- 46 조회
- 0 추천
- 0 비추천
-
목록
본문
스코틀랜드 교회를 무너뜨린 성경비평학
최 광 희 (Th.D.)
대한민국은 현재 세계에서 가장 큰 장로교회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한국 장로교회의 뿌리는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이다. 그런데 이 위대한 장로교회 제도를 만들고 전수해 준 스코틀랜드 교회가 19세기에 내부로부터 스스로 무너져 버린 것을 생각할 때 정말로 안타깝다. 스코틀랜드 교회는 왜 그토록 맥없이 무너져 버렸을까?
1528년에 패트릭 해밀턴이, 1546년 조지 위샤트가 화형당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16세기의 스코틀랜드 교회는 로마 가톨릭의 극심한 박해를 받으면서도 존 낙스 등 여러 사람의 활약으로 1560년에 장로교회 제도를 확립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16세기 말부터 교황의 자리에 올라앉은 국왕 때문에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는 국교회와 목숨을 건 싸움이 시작되었다. 1638년에 에든버러에서 국민언약을 체결하고 1647년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표준문서로 채택함으로 장로교회 제도를 확고히 한 듯하던 영국교회는 엘리자베스 1세와 제임스 1세 통치하에서, 특히 찰스 2세 때에 시작된 킬링타임 기간에 국교회와 처참한 박해를 당했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극심한 박해와 수많은 순교를 당하면서도 스코틀랜드 교회는 끝까지 싸워서 이겨냈고 성경적 교회를 유지했다는 사실이다. 또한 19세기 초에 교회가 변질하여 국교회와 합병하려고 할 때 강력하게 반발한 목사들을 중심으로 성경적 믿음을 유지하는 자유교회가 생겨났다. 그런데 목숨을 걸고 진리를 고수하던 스코틀랜드 자유교회는 예상치 못한 복병을 만났는데 바로 독일에서 들어온 성경 비평학이었다.
스코틀랜드 자유교회는 세속 정부(왕, 귀족)의 간섭으로부터 영적 독립을 수호하기 위해 1843년에 국교회에서 분리되어 나왔는데 이를 대분열(The Disruption) 사건이라 부른다. 처음에 자유교회는 국교회보다 보수적이고 개혁파 신학을 철저히 고수하였다. 그런데 자유교회는 진리에 대한 자유로운 탐구를 중시하다가 19세기 후반, 로벗슨 스미스를 포함한 많은 젊은 스코틀랜드 신학자들이 독일 유학을 통해 성경 고등비평을 도입하게 되었다. 세속 간섭으로부터의 자유가 진리로부터의 방종으로 전락하게 된 것은 슬픈 일이다.
스코틀랜드 교회를 무너뜨린 성경 비평학자 3인방 가운데 윌리엄 로벗슨 스미스는 이단 조사를 받고 교수직에서 해임되었으나, 조지 애덤 스미스는 총장과 총회장을 역임했고, 마커스 도즈는 교장으로 역임한 것을 보면 스코틀랜드 자유교회는 성경비평학에 의해 완전히 무너진 것을 알 수 있다. 스코틀랜드에 성경 비평학을 도입한 3인방은 다음과 같다.
1. 윌리엄 로벗슨 스미스 (William Robertson Smith, 1846-1894) - 애버딘
윌리엄 로벗슨 스미스는 스코틀랜드 자유교회 (Free Church of Scotland) 목사이자 신학자로서 성경 비평학의 선구자이자 가장 논란의 중심에 섰던 인물이다. 그는 1870년, 24세의 나이에 애버딘 Free Church College에서 히브리어 및 구약해석학 교수로 임명될 만큼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그는 독일의 고등비평(Higher Criticism)을 영국 및 스코틀랜드 신학계에 본격적으로 소개했다. 특히, 《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 제9판에 기고한 '성경(Bible)' 관련 내용에서 모세오경 문서설과 이사야서의 다중저자설 등 비평적 견해를 주장하였다. 자유교회 총회는 1877년부터 1881년까지 이어진 이단 재판(Heresy Trial)에서 로벗슨 스미스를 교수직에서 해임했다.
2. 조지 애덤 스미스 경 (Sir George Adam Smith, 1856-1942) - 글래스고/애버딘
조지 애덤 스미스 역시 스코틀랜드 자유교회(후에 연합 자유교회) 목사였다. 글래스고 Free Church College에서 히브리어 및 구약학 교수를 역임했다. 그는 단순히 비평학을 주장하는 것을 넘어, 비평학적 연구 결과를 경건한(pious) 방식으로 설교와 성경 이해를 통합하는 데 주력했다. 비평학 논란에도 불구하고 그는 1909년 애버딘 대학교 총장(Principal)으로 취임하였고 스코틀랜드 연합 자유교회 총회장(Moderator)까지 역임했다. 그는 비평학을 정통 기독교 신앙과 조화시키려 노력하여 스코틀랜드 교회 내에 비평적 관점을 수용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3. 마커스 도즈 (Marcus Dods, 1834-1909) - 글래스고/에든버러
스코틀랜드 자유교회(후에 연합 자유교회) 목사로서 글래스고의 렌필드 자유교회 목사로 25년간 역임하며 명설교가로 인정받았다. 1889년 에든버러 New College 신약 주석학 교수로 임명되었고, 1907년부터는 교장(Principal)을 역임했다. 1877년 '영감과 계시'라는 설교를 통해 성경의 축자영감설에 대해 회의적인 견해를 표명하여 이단성 조사를 받았다. 그는 구약 비평에 집중되었던 초기 논쟁의 초점을 신약 비평으로 확장시키는 데 영향을 주었다.
이상의 세 인물이 자유교회를 자유주의 교회로 망가뜨려 버린 역사적 사실을 기억하면 지금 한국교회가, 장로교회이든지 다른 교단이든지 관계없이, 진리를 고수하고 영혼을 살리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기 위해서 무엇을 우선으로 생각해야 할 것인지가 명확하다. 그것은 바로 야금야금 들어와서 교회의 내부를 부패시키는 성경 비평학자들을 확실하게 제거하는 것이다.
관련자료
-
다음






